기막힌 충무로
“술이나 한 잔 하자.”
“지금 오후 두시인데요.”
“낮술 좋잖아.”
“저 충무로 가요.”
“충무로? 왜?”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럼 갔다 와서 먹지 뭐. 근데 충무로 하니까 옛날 생각난다. 정말 많이 갔는데.”
“거기 뭐 볼만한 거 있나요?”
“있지. 있고말고. 기가 막힌 게 있으니까 꼭 보고와.”
기막힌 충무로 탐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쇄소의 불황이 역내까지 그늘을 드리운 걸까. 충무로역 지하도는 유난히 어둡다. 출구로 나가니 태양이 정면에서 비추어 표정이 절로 일그러진다. 행인이 내게 말을 건넨다.
“어머,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덕을 많이 쌓으신 것 같아요. 저 잠시 시간 좀...”
당신도 오늘 불황이다. 연신 뻐끔대는 그를 지나쳐 인쇄골목으로 향한다.
골목을 들어서자마자 퀵서비스 아저씨가 내게 인사를 한다. 얼떨결에 고개를 숙인다. 아저씨는 이빨을 보이며 나에게 다가선다. 내가 아니다. 뒤의 인쇄소 사장님이다. 머쓱해져 발걸음을 재촉한다. 손수레에 종이를 싣고 가던 아주머니가 그들에게 인사한다. 백반가게 아주머니도, 다방 아가씨도 서로 인사를 나눈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고양이마저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한다. 이곳은 인쇄골목이 아닌 인사골목 인걸까? 그들을 흉내 내어 인사를 건네며 골목을 돌아본다.
기계가 종이를 뽑아내는 소리에 사열하듯 발맞추어 걸어본다. ‘착- 착- 착- 착-.’ 이곳은 쪽방촌 같다. 방 대신 인쇄소들이 빼곡히 박혀있다. 열에 일곱은 문을 닫았음에도 종이와 잉크 냄새가 가득하다. 약간의 환각이 느껴진다. 낯선 단어로 도배된 인쇄소 간판과 벽면들이 현기증을 더한다. 도무송, 오시, 행택, 옵셋, 떡제본, 앰보... 도무지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어디에 와 있는가? 혼란스럽다. 잠시 벗어나고 싶은데 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더듬이를 잃은 개미처럼 우왕좌왕 들쑤신다. 가까스로 골목을 빠져 나오니 시장이다. 청국장, 김치찌개, 닭곰탕. 다양한 차림의 식당이 많다. 음식 냄새와 인쇄소에서 흘러나온 향이 합쳐져 묘한 내음을 풍긴다. 오른쪽 관자놀이가 욱신거린다. 쉼터를 찾아 시장을 휘적대며 걷는다. 그 때, 눈앞에 믿기 어려운 가게가 나타났다.
‘석굴암 커피숍’
시장 한 복판에, 마치 비밀의 장소로 가는 통로처럼 그것이 자리하고 있다. 석굴암 커피숍이라니. 두 단어의 조합이 주는 이질감. 대체 이 가게의 정체는 뭘까? 저 안에 본존불이라도 있는 걸까? 내부를 상상하던 중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관음보살과 제자들에 둘러싸여 쌍화차 한 잔만 할 수 있다면.’
실제로 가능한 곳일지도 모른다. 저 어둠 뒤의 무언가가 나를 이끈다. 인디아나존스는 피라미드 앞에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시커먼 통로로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긴다. 한 계단에 두 걸음씩 천천히. 혹시 석문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진 않다. 철컥.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리지 않는다. 다이너마이트를 챙겨왔어야 했나. 아쉽지만 관음보살과의 만남은 후일로 미룰 수밖에.
골목을 빠져나온 것도 잠시, 오묘한 향에 중독된 듯 다시 골목으로 향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인쇄소와 시장을 들락거린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듯이 큰 길로 나온다. 진양상가를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가본다. 마찬가지로 인쇄소가 알알이 박혀있다. 한 시간 가량 헤매었더니 목이 탄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음료수 냉장고를 발견한다. 한 캔 집어 가게로 들어서려는데 문에 ‘골뱅이 전문’글자가 큼지막하다. ‘먹태구이’, ‘계란말이’도 보인다. 옆 가게인가 싶어 살펴보니 양 옆의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다. 전주 가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음료수 한 잔에 바로 신호가 온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진양상가로 달려간다. 2층으로 올라가 두리번거렸지만 화장실은 없다. 세 명의 아주머니가 낄낄대며 나를 가로질러 간다. 춘삼월 꽃놀이라도 가는 표정이다. 그들이 향한 안쪽을 바라본다.
‘충무로 찬찬찬’
애매모호한 상호다. 입구에는 아저씨 한 명이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다. 아주머니들은 차례대로 문지기에게 만원을 건네며 ‘충무로 찬찬찬’으로 들어간다. 잠깐 열린 문틈으로 익숙한 뽕짝 비트가 흘러나온다. 호기심에 문지기에게 다가간다. 그는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하는 곳인지 묻는 질문에 눈웃음을 짓는다.
‘콜라텍이야. 총각도 들어갈텨?’
오줌이 쏙 들어간다. 나는 아직 누님들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돌아 나오는 내 앞으로 또 한 무리의 아주머니가 들어온다. 얼굴엔 홍조가 가득하다.
상가를 빙 둘러 다시 충무로역 입구로 왔다. 뭔가 아쉽다. 신기한 가게를 몇 군데 보았지만 기가 막히진 않다. 다시 한 번 인쇄골목으로 들어선다. ㄱ자, ㄴ자로 계속해서 꺾어진다. 그렇게 이십여 분을 헤맸다. 기막힌 것은 보이지 않는다. 포기하고 골목을 나서려는데 화장실이 보인다. 흔적은 남기고 가야겠지.
그 때였다. 화장실 문이 열리며 문제의 그녀가 나왔다. 쥐를 잡아먹은 듯한 입술, 똑같은 색의 원피스. 아니 원피스라기엔 짧고 블라우스라기엔 긴 아슬아슬한 상의. 살이 은은히 비치는 검정색 스타킹. 터질듯한 이란 단어는 그녀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틀림없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침이 꿀꺽 삼켜진다. 그녀는 나를 흘끔 보더니 한 인쇄소로 들어간다. 멍해져서 있는데 그녀가 다시 나온다. 나를 한 번 더 보더니 인쇄소 앞의 간이의자에 앉아 담배를 문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꼰다. 이럴 수가. 밴드스타킹이다. 스타킹은 한계까지 늘어난 채 허벅지에 걸쳐져있다. 상의 역시 탄력 있게 늘어나 둔부를 가리기 바쁘다. 상의와 스타킹 사이로 감춰져있던 뽀얀 맨살이 드러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아, 충무로의 기가 막힌 것이 바로 여기 있구나. 담배 한 개비는 너무 짧다. 담배와 함께 내 마음도 타들어간다. 용무를 마친 그녀는 담뱃불을 끄지도 않고 휙 던지더니 인쇄소로 유유히 들어간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나온 대사가 생각난다.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달콤했으니까’
그래, 충분하다. 이제 충무로를 떠날 수 있다.
※ 이 글은 '걷는 골목 이야기 - 월간 재미로(路)'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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