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J는 최근 자서전 대필 보조작가 일을 맡았다. 보수는 기십만원이었지만 일의 강도가 세지 않아 괜찮아 보였다. 메인작가인 K와 구두로 약속을 했는데, 며칠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스토리텔링을 좀 해줘야 할 것 같다고. J는 그 가격에 스토리텔링까지는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K는 곤란해 하더니 얼마를 원하냐고 물었다. J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200을 불렀다. K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고는 말이 없었다. 잠시 후, K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렇게 하자고, 대신 잘 부탁한다고.


몇일 뒤, J는 계약서를 쓰기 위해 K를 만났다. 50대 중반의 시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K는 얼마 전 늦둥이를 낳았다며 연신 사진을 보여주었다.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계약을 위해 출판사 담당자를 만나러 갔다. 출판사와 계약하는데 보조작가가 갈 필요는 없었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따라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직 출판사와 K의 계약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담당자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대화를 산으로 몰았다 들로 몰았다 했다. 한참을 빙빙 돌리더니 본심을 표했다. 걱정되는게 하나 있네요. 작가님 문체 말이예요. 대중적이지 않아 출판사도 리스크가 있습니다. 이건 값을 깎겠다는 이야기다. 들어보니 애초에 책정된 보수도 터무니없게 적었다. K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숨만 내쉬었다. 글쟁이의 자존심이 돈 앞에서 무너지는 꼴을 볼 수 없었던 J가 폭발하고 말았다. 하지 마시라고. 알아보니 오백에도 대필작가 구할 수 있더라는 담당자를 죽일 듯이 쏘아보고는 K와 함께 출판사를 나왔다. 돌아서는 K의 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그 후, J는 다른 출판사에서 일하는 지인을 만나 입에 침을 튀겨가며 개떡같았던 일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얘기를 듣던 지인이 그 작가분 혹시 K가 아니냐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아는 분이냐 물으니 지인이 말한 이야기는 이렇다.


K는 십수년 전 등단하여 개성있는 문체로 인정받아 제법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출판사 사장의 부탁으로 보증을 섰던 일이 잘못되어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 소득의 전부는 빚쟁이들의 차지였고, 그 후로 자신의 이름을 건 책은 나오지 못했다. 사정을 아는 이들마저 그의 약점을 잡고 값을 후려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최근에 들려오는 소식은 간간히 대필을 하며 생을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J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그때 조금만 참았더라면 K가 일을 할 수 있었을텐데. 황망함과 죄송스러움에 경황이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미안함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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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李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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